더불어 사는 삶

식민지 조선의 수퍼스타가 된 18세 항구소녀

ok 강성휘 2015. 7. 20. 01:00

 

 

 

 

 

 

 

 

 

 

 

식민지 조선의 수퍼스타가 된 18세 항구소녀

 

2015.7.19.일.

목포시민신문 호외 기고문

강성휘 전남도의회 기획사회위원장

 

724일부터 28일까지 삼학도와 선창 일대에서 목포항구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를 상징하는 노래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또는 목포는 항구다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1935년 발표 되었으니 80년이란 엄청난 시간이 흘렀지만 목포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흥얼거리거나 불러 보았을 목포의 눈물이다.

 

지금의 조선일보를 생각하면 그런 일도 했을까 싶지만 어쨌거나 1934년 조선일보사는 당시 OK레코드사와 손잡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무너져가는 민족의 정서를 세우기 위해 전국의 6대 도시를 대상으로 애향가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3천편의 응모작 중에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이 낸 목포의 노래’(이후 목포의 눈물로 변경) 1등으로 선정되어 목포의 눈물의 가사가 탄생되었고, 당대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을 거쳐 1935년 역사적인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발표되자 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18세 항구소녀 이난영은 식민지 조선의 수퍼스타가 되었다.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목포의 눈물음반 판매량이 25만장 가량인데 이를 당시 생활수준으로 따지면 단일 음반 판매량으로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하는 국민가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250만장을 훨씬 능가하고, 다방들에서는 이 노래를 듣고 외우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특유의 비음 섞인 담담하고 애수 깃든, 요즘으로 치자면 묘하게 섹시한 목소리는 식민지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시대와 민족의 처지를 비유하는 듯한 가사는 놀라운 공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하고, 삶은 무상한 것, 식민지 조선의 수퍼스타 이난영도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의 신산한 삶속에서 196541149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1916년 목포항 부두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식모살이를 떠나는 어머니를 따라간 제주에서 한 악극단장의 눈에 띄어 가수의 길로 들어선 이난영,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으나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이어 당시 최고 남자가수로 상종가를 치던,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부남이었던 진주출신 남인수와 동거하였으나 남인수마져 폐결핵으로 잃고, 자녀들을 미국으로 보낸 후 본인마저 쓸쓸히 눈을 감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경기도 파주의 공원묘지에 안장된지 41년 만에 고향 목포, 바다가 보이는 삼학도에 자리를 잡고 백일 동안 꽃이 핀다는 백일홍으로 피어나 삼학도와 목포항을 바라 보고 있다.

 

노적봉 쪽에서 유달산을 오르다 보면 우리나라 노래비 제1목포의 눈물노래비가 관광객을 맞이하고, 삼학도에서는 우리나라 제1호 수목장 가수 이난영의 수목장지가 자리잡고 있다.

 

항구축제가 열리는 24일부터 28일 기간 동안 목포의 맛과 멋도 즐기시고, 혹 생각나신다면 항구도시 목포가 배출한 식민지 조선의 수퍼스타 이난영의 백일홍 수목장지가 있는 대삼학도 중턱에 올라 목포의 눈물한곡조도 좋겠다.

 

* 하나, ‘목포의 눈물작곡가는 유명한 손목인이나 작사자 문일석은 지금까지도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로 남아 있다. 문일석은 조선일보사의 애향가 공모 1등 선정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상금도 받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목포의 눈물이후로 어떤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고, 오직 목포의 눈물한곡만으로 작사가 명단에 오른 특별한 존재다.

 

* , ‘목포의 눈물’ 2절 중 삼백년 원한 품은의 가사가 노래등록 당시 문제가 되었다. 일제 검열 당국은 노랫말 중 삼백년 원한 품은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며 문제를 삼았다. 이에 OK레코드사에서는 삼백년 원한 품은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 연못을 감아도는 부드러운 바람은쯤으로 해석)으로 가사를 바꾸어 제출해 검열을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