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지켜온 민주화의 길
강 성 휘(전남도의원)
아스팔트에서 맺어진 인연
언제였을까? 87년 6월 목포의 거리에서다. 여름보다 더 뜨거웠던 6월 민주항쟁의 한 복판에서, 아스팔트 위에서 의장님을 그렇게 만났다.
되돌아 보면 당시 우리지역의 대표적인 어르신이었던 임기준 목사님과 그리고 김현삼 목사님도 함께 계셨었으니 벌씨 20년도 넘은 얘기다. 의장님께서도 당시 50대 후반이셨다. 그리고 한줄로 서면 보이지도 않을 까마득한 후배들도 어느새 하얀 머리카락이 차곡히 들어섰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아스팔트 위의 인연은 이어지고 이어져 5월과 통일의 거리에서 뿐만아니라 지방선거의 현장에서, 끝없이 펼처지는 삶과 투쟁의 현장에서 내내 ‘의장님’으로 만나왔다.
생각해보니 그사이 한번도 ‘의장님’ 이라는 계급장을 뗀 적이 없다. 고단, 어려움, 시련, 이런 단어로 연결되는 ‘의장’이라는 그 일을 맡을 사람이 그리도 없었는가 싶다. 박의장님만큼 그 일에 적임자가 없었으리라.
미국에 대한 사자후(獅子吼)
30년 전 5.18항쟁을 거쳐 더욱 철저하게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셨던 의장님께서는 대중앞에 서실 때마다 “진빵에 앙꼬”처럼 반드시 언급하는 사항이 있다. 바로 “미국”에 관한 얘기다.
5.18 행사장에서건, 8.15 통일관련 행사장에서건 일관된 사자후, “우리나라 사람 분단과 불행의 원인은 바로 미국의 한반도 점령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있고, 8.15는 해방이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에 의한 새로운 예속이며, 이 첫걸음이 오늘의 우리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한시라도 미국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잃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80-90년대 주로 역사적인 측면, 정치적인 측면에서 미국문제에 접근했다면 이후는 북미관계, 미군기지 등의 현안과 더불어 최근에는 FTA문제 등으로 첨예하게 우리 국민의 이해관계와 대립되어 있는데 박의장님의 미국문제에 대한 시각은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나라의 본질적 위치를 구조적으로 꿰뚫고 있다. 이 구조적 질곡의 해소는 활동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결혼식 주례
나는 1997년 3월 29일에 목포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장남이다 보니 이래 저래 고향인 영광의 버스터미널 가까운 곳에 결혼식장을 잡게되었다.
당시 의장님은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목민협) 의장님으로 계셨고, 나는 목민협의 소속단체인 목포민주청년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주례를 부탁드렸고, 목포에 계신 분이 영광까지 오시는 일이 번거로운 일이었음에도 흔쾌히 응해 주셨다.
벌써 13년 전 일이라 특유의 소란스러움으로만 기억되는 특별할 것 없는 결혼식이었지만 “힘든 길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으니 그 마음 변치 말고 결혼생활과 더불어 활동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신 의장님의 말씀은 아직도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다.
싸움도 많이 하고 힘든 시절도 많았지만 의장님의 주례말씀에서처럼 힘든 길에서 만났다는 것, 가치관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것이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지금까지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 때나 겨우 찾아 뵙는.....
98년 시의회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또 지금은 도의회에 있다는 핑계로 1년에 두 번 명절때와 5월 행사, 그리고 또 몇 번의 행사 때에 뵙는 것이 전부다. ‘의장님! 의장님!’ 말로만이다.
뵐 때마다 말은 잘한다. “명절 끝나고 올랍니다”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말뿐이다. 생활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참 면목 없다.
차분하게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며, 돌아가는 정세며 제대로 말씀 들어 본지가 10년도 넘었다. 이 긴 시간을 건성으로만 모셨으니 나의 얕은 마음을 의장님은 틀림없이 알고 계실 것이다. 다만 모른체하고 계실 뿐.... 올해가 가기 전 꼭 찾아 뵈어야 겠다.
의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의회는 좀 어떠냐? 그래도 너희들 같은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는 퇴물 아니냐?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지만 꼭 그런게 아니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봐라. 그래도 기대 했는데 그렇게 안되지 않더냐. 그런데 이놈의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어떻게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세상이 거꾸로 가도 한참을 거꾸로 가버리냐?” 하신다.
아스팔트 위에서 뛰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 뜨끔하다. 지방의원 한답시고 녹슬고, 허물어진 정신과 실천을 나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애국자도 자식 걱정은 끝없어
의장님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셨다. 큰 아드님은 서울에 소재한 지역에서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어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덜 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둘째는 취직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대불공단의 업체에 직장을 다닌다.
2007년 5월에 행사장에서 만난 인사를 올렸더니 한쪽으로 따로 불러 보자시더니 “둘째가 직장이 너무 힘들고 보수가 박할뿐더러 회사가 오래 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라며 주변에 혹 다닐만한 일자리가 있으면 꼭 소개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팔순에 이르는 동안 부를 쌓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기에 물려줄 재산을 셈할 수 없는 분, 팔순에 이르러 아들의 직장을 걱정하며 까마득한 후배에게 어렵게 어렵게 꺼내신 “자식놈 일 할만한 곳 있는지 알아 보라”는 말씀에 가슴이 저려왔다. 평생 한길을 달려온 민주투사도 자식 앞에서는 여느 평범한 부모의 마음과 어쩜 이리 꼭 같을까?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다 보니 둘째 아드님의 새 일자리는 지금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연대와 연합을 통하여
팔순을 맞이하신 의장님을 생각하면서 나를 되돌아 본다. 의장님처럼 오직 한길을 달려 갈 수 있을까? 굽어지고, 돌아가면서도 유유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처럼 그런 삶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 민족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진보성만큼 “격차사회로 정의되는 양극화의 위기속에서 비정규직 등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씀이며, “민주정부라 하건, 진보정부라 하건 80년대와 90년대를 함께 헤쳐 온 사람들이 꿈꾸는 건강한 사회, 건강한 정부는 연대와 연합의 실천으로만 가능하다”는 의장님의 말씀은 오늘의 행동지표로 다가온다.
의장님! 만수무강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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